"한 사람"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보십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찾습니다. 저도 그동안 말씀을 전하면서 한 사람의 귀함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좋은 시절에는 한 사람의 귀함을 모르고 지날 때가 많았습니다. 오히려 교만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어려웠던  때에 한 사람이 이렇게  귀하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처절한 고난을 주셨을까? 왜 밑바닥까지 헤메게 하시고 사느냐 죽느냐의 죽기직전까지 몰아가실까?  왜 자존심 다 깨버리시고 나 자신의 무력하고 연약함을 직면할수 밖에 없게 하셨을까? 답은 바로 그 때에도 내가 너희 하나님이기를 원하셨다는 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철저히 체험한 한 사람을 세상에 보내지 아무나 보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세상 시험과 역경도 다 이겨내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려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의 한 사람을 척박한 가나안 땅에 무조건 보내 버린 후에 그 모든 것을 다 이겨낼 정도까지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에서 열방의 아버지까지 키우셨구나, 아들이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애굽땅에서 요게벳이 아들을 낳게 하시고 결국은 강물에 흘려 보내며 피눈물의 기도를 드릴수 밖에 없게 하신 하나님, 저 바로가 원수인데 그 바로의 공주의 손에 건짐받고 입양케 하신 하나님, 결국 친부모인 자기를 보모로 삼으시고 다시 그 아이를 안고 젖먹이게 하신 하나님, 도대체 요게벳이 체험한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할수 있을까요.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빼어내 구속한 여호와로라" 그녀가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와 외쳐 부른 찬양과 기도가 아기 모세에게 흘러갔을텐데, 아 ,이런 어미의 영성이 채워진 자녀가 장차 하나님께 얼마나 크게 쓰임받을까요. 모세는 크면서 자기를 키워주었던 분이 양부모가 사실 자기를 죽이려 한 바로집안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이었을까요. 친부모의 민족을 자기 힘으로 도우려다가 오히려 도망자신세가 되고 인생이 다 끝났다고 생각되는 나이 80이 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애굽을 잘 알았지만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았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면서 준비케 하시고 때가 되어 애굽에 보내신 하나님의 신비한 지혜와 섭리를 우리가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 정말 하나님은 놀라우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을 보더라도 그 파란만장한 삶가운데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정작 요셉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형제들에게 팔려 노예가 되었고 그토록 충성했던 사람의 집에 배신당하고 감옥에 들어가게  하시기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없이 오히려 내게 주신 꿈을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전적으로 믿었던 그 요셉의 믿음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 하나님은 나라를 세우고 한 민족을 살릴 한 사람을 정말 철저하고 완전하게 준비시키셨습니다. 아무나 나라와 국가를 살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저 위대한 한 사람이 이 나라와 민족에게 또한 우리 교회에서 배출되고 양육되고 나타나기를 기도했었지요. 내가 1대가 될지, 내 자녀대가 될지, 손자손녀대가 될지, 그 후가 될지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그 과정에서 쓰임받을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했는지 몰라도 정말 한 사람의 귀함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상황을 통해서 절실하게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준비안된 한 사람때문에 교회가 얼마나 어렵고 힘들수 있는지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정말 아는 한 사람때문에 교회가 살아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준비시켜주신 한 사람을 위해 더욱 더 원하고 바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역사는 꼭 하나님을 믿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 요셉 한 사람, 다윗 한 사람, 다니엘 한 사람이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니까 하나님은 그를 세상의 중심과 권력의 중심에 세우셨습니다. 한 사람이 모여 많은 사람이 됩니다. 종교개혁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한 사람 그러면 마틴 루터를 떠올립니다. 미국의 영적대각성 부흥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한 사람 그러면 죠나단 에드워드를 떠올립니다. 요즈음 세상 뉴스를 보면서 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살고 죽는 흥망이 달려 있구나를 절실히 느끼고 조국과 미국을 위해, 세계를 위해, 교회와 나라를 살리는 한 사람이 세워지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짓게 되고 또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또한 한 사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임하고 주를 믿는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변에 환란이나 풍파가 불 때 기억하십시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바로 서면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민족도 바로 설줄을 믿습니다. 성도님들이 예수님을 따라 그 한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고칠 데도 많고 손댈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오래 되어서 아무리 고쳐도 또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 형편으로 이걸 어떻게 하지 하고 걱정되기도 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고치고 있어야 하는지 새 건물로 이사갔으면 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성도님들 중에 바쁘신 중에 교회 오셔서 청소하시는 분이 있고 고장난 것을  고치시거나 여기저기 꾸미시거나 뭘 놓고 가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손길을 통해 오래된 교회지만 깨끗하게 보이고 끊임없이 고장나지만 계속 고치면서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저는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용하시는데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게 사용하시는지 지켜 보면서 더욱 더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교회 일을 하고 집에 왔는데 피곤한지 그냥 소파에 누워 자고 있는데 침대에 가서 자라고, 왜 편한 침대 놔두고 불편하게 새우같이 쪽잠을 자냐고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을까요? 이게 편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태아의 아기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엄마 뱃속에서 움크리고 자는 기분이 이런거 아니야? 그리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이렇게 평안하지 않을까, 그 원초적인 평안이 있다면 어디서 잔들, 무엇을 한들 무엇이 문제일까 생각했습니다.


예수 믿고 새생명을 가진 한 사람으로 산다는 것도 큰 복인데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힘들 때도 있고 짜증이 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할 때 기쁘게 일하다면 더욱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나와 이웃을 더욱 풍성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