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여러분이 갖고 있는 세계관은 무엇입니까? 기존 세계관은 인간중심,과학중심,물질중심인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첫째 역사를 창조-타락-구속으로 보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답이 나옵니다. 최근 창조과학회에서 진화론이 가설,추론임을 밝히고 창조신앙을 알리고 있습니다. 사회복음운동 등을 통해 사회에 부응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필요하지만 서로들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은 바뀔 수 없습니다. 복음이라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이 중심에 세워져야 세상도 사람도 바뀌는 희망이 생길 것입니다. 잘못하면 과학과 신학은 상극이니, 학문과 신앙은 물과 기름이니 이런 오해에 빠지고 논쟁에 빠지게 되서 복음은 뒷전이 되게
됩니다. 또한 피조물끼리의 논쟁에 창조주하나님을 화두로
삼아서 같은 급으로 치부해버리거나 원래 창조목적을 왜곡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우리가 창조를 말할 때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끼리 부딛쳐서 이념적 분쟁에 빠지고 소모적인 싸움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비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이런 공동체가 없습니다.
수천년동안 세상의 대립과 분쟁을 보면 이 세상에서는
세상과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복음이 희망이고 몸인 교회가 희망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에 주신 선물인 세상과 학문, 등을 다 쓰레기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질서와 진리에 속한 영역으로 보고 대립된 관계에서 문제를 보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면 희망이 생길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서 복음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교회의 중심이고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예수가 세상의 희망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직 복음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세속적인
사회에서 교회의 존재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복음을 붙잡는다면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을 붙잡고 희망으로 삼는다면 학문을 터부시하거나 가로막지 않고 대화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편파적이라는 오해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대할 때 실수하는 관점은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는 것입니다. 선과 악, 흑백논리로 구분해서 바라볼 때 논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건 서구적인 헬레니즘에서 왔지
기독교적 사고가 아닙니다. 구약의 헤브라이즘도 신약의 교회론도 주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합니다. 오히려 세상이 생명,근원에 대한 질문에 물질,과학같은 방법만 취하고 다른 접근을 가로막고
있음을 밝혀야 합니다. 인간도, 세상도 피조물임을 부인하지 않고 쌓는 것은 바벨탑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을 돌보라고 하신 창조의 뜻을 좇아 쌓는 창조물은 얼마나 보기에 좋을까요. 우리가 찬양하는 이유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위대함은 찬송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창조세계의 주권은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돌봄을 인간에게 맡겼다고 한 성경의 기록을 믿습니다. 세상은 인간에게 허락하신 선물이지만 동시에 청지기라는 책임이 생기는 것입니다. 돌보고 회복하라는 세상에 대립하거나 논쟁하다 주객이 전도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하심을
떨어뜨리거나 창조의 목적이 뒷전에 밀리지 않도록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 능력이 복음입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다가 세상과 대적자의 핍박과 도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은 인간의 지혜의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선언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다함께 복음이 희망임을 믿고 타락한 창조세계 속에 들어가서 새롭게 창조되는 길인
복음을 열심히 전하십시다.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2:4-5)